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필로프의 28인 (문단 편집) === 2015년 기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진실 === 그러나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이야기는 전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판필로프의 28인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고 다시금 논란이 커지자,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는 2015년 7월 8일에 아예 의혹에 쐐기를 박는 기밀문서 스캔본을 인터넷으로 [[http://statearchive.ru/607|공개]]해버렸다. 이 문서는 1948년에 소련 최고군사검찰에서 판필로프 사단 28인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내사한 보고자료이다. 이 보고자료에서 소련 군사검찰은 공식적으로 이 영웅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종군기자가 불확실한 카더라를 듣고 꾸며낸 '''소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내사가 이뤄진 계기는 1947년 11월, [[하르키우|하리코프]] 지방군사검찰청에 이반 도브로바빈(Иван Е. Добробабин)이 체포되면서부터였다. 이반 도브로바빈은 대전 중 독일군에게 부역(附逆)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취조과정에서 자신이 (당시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판필로프 사단의 28인 중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사한게 아니라 11월 16일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독일군에게 점령된 고향(페레코프)으로 돌아갔음을 밝힌다. 그러나 계속된 조사 결과, 도브로바빈은 단순히 귀향에 그치지 않고 독일군에게 적극 협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보조경찰대에 들어가 [[빨치산|파르티잔]] 소탕전 및 강제노동인력 징용 등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우크라이나]]가 해방되자 다시 재빨리 소련군에 입대해 부역 사실을 감추려 했다. [[소비에트 연방 영웅|소련 인민영웅]]이 멀쩡히 살아 부역행위까지 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자칫하면 체제기반을 흔들 수도 있었다. 이에 소련 군사검찰은 조사 범위를 판필로프의 28인 영웅담 전체의 진상 조사로 확대하고, 니콜라이 아파나셰프(Николай П. Афанасьев) 중장을 책임자로 전면 내사에 들어갔다. 우선 해당 부대의 상급부대인 제1075연대 연대장이었던 일리야 카프로프(Илья В. Капров) 대령을 소환 조사하였다. 결국 카프로프 대령은 두보세코보에서 독일군 제11기갑사단과 격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28인과는 무관한 전투'''였음을 시인하였다. 계속된 조사 결과, 이 영웅담을 처음 취재, 보도한 《크라스나야즈베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 붉은별)》지 종군기자들마저 뒤늦게 날조 사실을 실토했다. 종군기자 바실리 코로테예프(Василий И. Коротеев) 등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이반 판필로프가 사단장이던 제316소총병사단의 정치장교 세르게이 예고로프로부터였다. 당시 제316소총병사단은 11월 18일에 사단장 이반 판필로프(Иван В. Панфилов) 소장이 전사하고 제8 "근위(혹은 친위) 판필로프" 사단의 칭호까지 얻으면서[* 정확히는 사단이 10월에 거둔 전공을 높이 산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의 추천으로, 11월 17일자로 제8 근위 소총병 사단으로 단대호 변경이 먼저 이뤄졌다. 다음날 18일에 사단 지휘소에 독일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져 판필로프 소장이 전사하자, 이어 23일자로 부대명에 "판필로프"까지 붙이기로 결정되었다.] 갖가지 무용담이 도배된 선전이 이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예고로프는 11월 24일에 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기자들에게, 판필로프 사단 소속 병사들이 독일군 전차 54대의 공격을 맞아 항복하자는 2명을 처단해가면서 최후의 1인까지 용전분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정확한 소속부대, 전투원 수, 전과는 물론 전투가 벌어진 날짜와 장소까지 기사에 필요한 디테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크라스나야즈베즈다》지 기자들은 적당히 병사 숫자부터 28명(원래 30명 중 2명을 즉결처형하고 남은 인원)으로 맞추고, 이 숫자에 맞게 전사/실종자 명단에서 이름을 추려내었으며, 전과도 독일군 전차 18대를 격파하고 8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고 부풀려서 영웅담을 창작해냈다. 이 기사가 11월 27일자로 《크라스나야즈베즈다》 지에 실리게 되자,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까지 관심을 갖고 호평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점점 더 부풀려졌다. 처음 나간 기사에서는 28명만 싸웠다고만 하고 날짜와 장소는 대충 얼버무렸으나, 1942년 1월 22일의 후속 기사에서는 이 전투가 11월 16일에 두보세코보에서 있었다고 쓰고 갖가지 무용담을 추가로 창작해냈다. 이들은 당시 절박한 전황 속에서 소련 국민과 장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자백'''했다. 또한 조사단은 전사했다고 알려진 28인의 행적을 샅샅이 추적한 결과, 도브로바빈 이외에도 사실 5명이 더 생존해있음을 밝혀냈다. 당시 혼란스러운 전황 중에 문서 상으로는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으나, 실은 살아있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 다닐 쿠제베르게노프(Даниил А. Кожубергенов)는 1942년에 적전도주 죄목으로 [[NKVD]]에 체포되어 [[형벌 부대]]에 넘겨진 전력까지 있었다. 이들 생존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영웅담에서 언급되는 전투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증언까지 했다. 이러한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아파나셰프 중장은 판필로프의 28용사 영웅담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보고서를 소련 정치국의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제출하였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안드레이 즈다노프|즈다노프]]는 이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게까지 보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수뇌부는 이미 대전 중에 대대적으로 선전된 이 영웅담을 철회하는 것은 민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아파나셰프 보고서는 기밀로 봉인되었으며, 관련자들에게는 철저한 입단속 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재조사의 원인을 제공한 이반 도브로바빈은 이후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추서된 훈장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가 모두 박탈되었다. 이후 1955년에 다시 7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출소 후에 은거하다가 1996년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